[히카루, 니 언제 오노? 올 때 두부 좀.]

반짝, 또박또박하게 적힌 메시지를 알리며 점멸하는 휴대폰 액정을 힐끔 쳐다보는 나와 동시에 아닌 척 이쪽을 주목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다지 흥미를 끌 만한 일이 아님에도 워낙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녀석들답게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을 이쪽으로 보낸다. 모조리 무시한 채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소지품을 정리하자 뭔가에 쫓기듯 녀석들이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갈라고?"

"어, 먼저 가봐야겠다."

"와? 애인이 부르나?"

덧붙여진 말에 가방을 어깨에 메던 손이 멈추고, 이때다 싶었는지 봇물 터지듯 질문들이 쏟아진다.

"니 대체 언제까지 꼭꼭 숨겨둘라 카노?"

"친구 좋다는 게 뭐고. 애인 소개 좀 시켜도!"

이제야 지금까지의 행적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통화할 때라던가 메일을 할 때라던가, 의아할 정도로 쏟아지던 시선들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이쪽을 향해 기분 나쁠 정도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눈동자들의 기대감에 배신할 수 없으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내 애인 없는데."

산산이 부서지는 눈빛이 제법 맘에 들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마주하는 시선들은 여러 말을 쏟아냈으나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다시 가방을 고쳐 메자 이번엔 손을 뻗어 붙잡는다.

"애인 없다고? 카면 그 사람은 누군데?!"

"……그 사람?"

"니랑 같이 사는 사람! 애인 아니가?!"

"……내 혼자 사는데?"

한 번 더 경악의 시선들이 쏟아졌다. 돌아서는 날 붙잡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그 분위기 속에서 빠져나오며 메시지에 답장했다.

[지금 가요.]

  달도 자고 길고양이도 자는 한여름 새벽 밤중, 문지방을 넘어서 졸졸졸 물소리가 들린다. 잠귀 밝은 자이젠은 요 근래 매번 이 시간에 까무룩 잠에서 깬다. 다시 말하면 이 시간만 되면 저놈의 물소리가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잠에 들었다 화들짝 깬 바람에 조금 지끈대는 이마빡을 지그시 손등으로 누르면서, 자이젠은 혼자 무겁게 한숨을 푸우 내쉬었다. ‘저 인간이 또…….’, 소리가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입안이 타박하니 바싹 마른 것도 있고, 굳이 불평을 까대어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언지라 그냥 이불만 끌어다 돌돌 말고 숫제 귀를 틀어막듯이 베개에 머리통을 묻었다.

졸졸졸.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다시 잠에 들기엔 심히 거슬리는 소음이었으나 자이젠은 아랫입술만 꾹 앙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엔 나는 둘째 치고 이웃집에 실례니 작작 좀 하라고 한 소리라도 할까 했는데 요즘은 그냥 놔두고 있다. 이 야심한 시간, 한 시간씩 수도꼭지를 열어놓고 오시타리가 혼자서 오밤중에 무얼 하는지 이젠 자이젠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튼 꼴 뵈기 싫게…….”

아이는 부루퉁한 입술로 조그맣게 볼멘소리를 뱉었다. 자리를 비운지는 좀 되었을 텐데 오래오래 같은 자리에 누워 그런지 빈 자리에서도 훈한 오시타리의 체취가 느껴졌다. 딸딸딸 굴러가는 선풍기 날개 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자신의 규칙적인 호흡 사이에서 자이젠은 오시타리를 생각했다.

오시타리는 손을 씻고 있었다. 지문이 벗겨지도록, 손바닥과 손끝 살이 다 문드러지도록 뽀득뽀득, 성심성의껏.

  입부한 지 1년이 채 되지도 않은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과 발군의 실력으로 당당히 레귤러자리를 꿰찬 통칭 ‘천재’ 자이젠 히카루란 녀석은 좀처럼 포커페이스를 거두는 법이 없었다. 그와 달리 입만큼은 매번 귀염성 없는 말만을 내뱉기 바빴는데. 아니, 정정. 귀염성 없다기보다는 독기 서린 차디찬 말들만 내뱉기 바빴는데 그건 한 학년 위의 선배에게도 예외는 없는지 녀석의 입에 주로 오르내리는 대상은 나, 오시타리 켄야였다. 상대와 상황을 전혀 고려 않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 쓸데없이 적을 많이 만드는 녀석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녀석을 전혀 모르는 친구들에게서 당황스러운 눈길을 받을 때마다 오히려 이쪽이 더 당황스러울 정도로 녀석에게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 더더욱 큰 문제였다.

처음 녀석을 만났을 땐 이렇다 할 반응도 없고 웃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또 말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앞서 말했듯 사람 속을 긁는 소리는 재잘재잘 꽤 잘하는 편이라 순간적으로 울컥하기도 했더랬다. 건방진 성격만큼이나 테니스 실력 또한 좋아서 배로 더 얄미웠었다. 여기저기 착실하게 독설을 뿌리고 다니면서 녀석은 테니스부원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는데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도 같았다. 이상하게 녀석은 지나쳐가면서도 한 번씩 더 시선을 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 때문에 녀석이 제아무리 미운 소릴 해도 받아주는 게 아닐까 스스로 생각했다. ‘니가 이카니깐 점마가 더 저카지.’ 라는 이야길 들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왜인지 녀석이 혼자 다니는걸 보는 게 괴로워질 때쯤 마침 학교를 오가는 방향이 같아 녀석은 자연스럽게 내 일상 안으로 침투되어왔다. 이렇게 말하는 걸 녀석이 들었다면 ‘켄야 씨가 끼어든 거죠.’ 라고 하겠지만.

그러던 언제였더라. 당번 일로 녀석을 먼저 보내고 혼자 하교하게 되었던 그 날, 하굣길 도중 녀석을 만났었다. 녀석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녀석의 옆, 그보다는 조금 더 아래, 낮은 곳에서 녀석의 손을 꼭 잡은 어린아이가 있었다. 동생인가?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녀석이 아이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난 녀석이 멀어질 때까지 녀석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저 녀석,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던가.

뭔가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녀석이 지었던 그 웃음이, 표정이 내내 방안을 떠다녔다. 그리고 다음 날 등굣길,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의 녀석을 보자 마치 어제 일은 꿈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다시 한 번 더 그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더 그 얼굴을 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 머나?”

거울 앞에 선 나니와의 메로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성 정체성을 다소간 상실한 감탄사. 그리고 오사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신속함과 기민함을 자랑하는 아름답고 늘씬한 다리를 십분 드러내주는 청바지 허리선 위로 볼록 튀어나온 것은…….

“이……. 이기 뭐고?”

군살이렷다.

오시타리 켄야, 괄호 만 25세, 남자는 망연한 낯으로 거울 앞에 서서 턱을 톡 떨어트렸다. 아침 일찍 연구실로 가야 할 일이 생겨 후루룩 옷을 끼워 입고, 마침내 짤막한 바지 지퍼를 채우고 허리단추를 걸어잠그마 손을 따악 올렸는데 어째 기묘한 것이 눈에 밟히더란다. 지금까지 자기 몸에서는 본 적이 없는 무언가. 오시타리는 칠십 대 노인 바늘귀 꿰듯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거울 앞에 바짝 다가섰다.

몸에다 1차 보정을 더해주는 전신거울로도 다 담지 못하는 미남자의 바지허리 위로, 맙소사, 쫀득한 살이 잘 부푼 머핀처럼 올라와 있었다. 제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사태에 오시타리가 마치 헛것이라도 만지듯 보드라운 살을 더듬었다. 흥덩하게 잡히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잡아보니 감촉이 딱딱하고 질긴 근육은 아니고, 말랑말랑 포근한 걸 보아 분명 지방덩어리였다.

“아?”

제 뱃살을 보고 ‘아?’라니, 찔 만 하니까 쪘겠지. 혹자는 뭘 당연한 걸 가지고 그렇게 붕어눈을 뜨고 놀라느냐 빈정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시타리는 참말로 25년 10개월에 이르는 인생 동안 살이 쪄본 적이 없었기에 군살이라는 건 몹시 두렵고 낯선 것이었다. 친구들이 여름을 앞두고 다이어트다, 근육 트레이닝이다 바삐 땀을 흘릴 때도 소다맛 아이스크림을 줄줄 빨며 구경이나 했지 오시타리 인생에 다이어트라는 단어는 애초에 존재하질 않았다. 먹어도 먹어도 어지간해선 안 쪘고, 오시타리 본인도 제 몸매에 대해선 크게 신경 써본 일이 없었다. 그냥 이 아름다운 몸은, 저절로 타고난 거였다. 부모님과 하느님, 혹은 부처님의 은혜로.

누가 보면 배부른 소리로 대하소설을 써붙인다고 기만질도 작작하라며 뺨을 후려쳤을 소리겠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 축복받은 체질이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기도 했다. 기실 이 창피스런 사태는 오시타리가 자초한 나태의 소산이었으므로.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을 처음 맞이해본 오시타리에게 똥배 살을 해결할 뾰족한 방안이 바로바로 떠오를 턱이 있나, 우선 이 궁지에 몰린 총각의 머릿속에 스친 건 ‘히카루한테 들키면 안 돼.’라는 일념 하나였다. 자이젠이 오시타리의 가죽을 어여삐 여겨 연애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쁜 떡한테 콩고물 한 번 더 묻혀주고픈 게 인지상정인지라, 내심 자이젠이 오시타리의 우월한 하드웨어를 자랑스레 여기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똥배 나온 애인’의 실태는 되도록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뱃살이 쏙 들어가기까지 한 며칠, 길어봐야 일주일이나 가겠나 했다. 딱 그 정도만 꾹 참고 첫날밤 촛대 앞에 앉아 고름 붙든 새색시의 소울에 빙의해 자이젠 앞에서 맨몸을 열심히 감추었다. 정작 자이젠은 오시타리가 웃통을 벗든 빤스를 벗든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행여나 드로즈 위로 불퉁하니 대가리를 내민 살이 들킬까 싶어 옷을 벗고 여밀 때는 노상 옷장 문 뒤에 숨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