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2015. 5. 13. 02:49

검은 영겁의 시간을 홀로 버텨왔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신을 향한 모진 말들에 대해 검은 고요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주인을 해하는 검이라는 오명도 이름이 아깝다는 비난도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실소를 지은 적도 있는 것 같았다. 검의 본디 목적은 남을 해하는 것.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여전히 검은 침묵했다.


「자이젠 히카루라. 과연, 이름과 같이 곱구나.」


어쩌면 자신은 지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라고 자조해보아도 눈을 감으면 언제나 그 날의 그 전장으로 불려가는 자신이 있었다.


검은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 망설임 없이 타인의 피를 온몸으로 물들이며 달려나가던 자이젠의 발목을 묶은 것은 다른 것도 아닌 등 뒤의 주인이었다. 왈칵, 처음으로 자신의 몸 위로 쏟아진 제 주인의 피가 너무나도 뜨거워서 도리어 차갑게 식어버린 자이젠이 있었다. 자이젠이 미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기우뚱 중심을 잃은 주인의 몸은 빠르게 내동댕이쳐졌다. 자신만이라도 몸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눈이 감겼다. 깜깜한 칼집 안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자이젠은 제 주인의 떨리는 손길을 느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오시타리 켄야, 목을 베었습니다!」


이것이.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자신을 매만지는 손길이 달라져 왔는지 자이젠은 세어본 일이 없었다. 자신을 향해 떠드는 말들에 대해 대꾸한 일 또한 없었다. 그저 다정하면서 간지러웠던 그 손길이 그리웠다. 히카루, 라고 불러주던 상냥한 음성이 그리웠다. 우습게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 주인과의 기억들은 점점 더 선명해져만 갔다. 그것이 진실로 함께 겪었던 기억인지, 한낱 자신의 왜곡된 환상인지 스스로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을 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검은 또다시 눈을 감을 뿐이었다.


「히카루. 네 이름처럼 몹시도 반짝이는구나. 정말이지 아름답다.」


언젠가, 또다시. 자신을 빛처럼 반짝인다는 평을 들을 날이 올까. 제멋대로 히카루라고 불러주는 이가 나타날까.


다시 한 번. 오시타리 켄야를, 만날 수 있을까.



*



"사니와님. 타도입니다."


수백 년, 그리고 또 수백 년을 지나온 자신을 깨우는 음성이 들려왔다. 낯선 손길이 조심스럽게 자신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주인을 해하는 검을 다루는 손길치곤 제법 괜찮은 예우에 자이젠은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감탄했다. 얼마 만인가. 자신을 그저 검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감지한 것은. 곧 자이젠의 몸이 떨렸다. 이상하게도, 익숙하면서 그리운 손길이었다. 조심히, 그리고 단호하게 그 손은 자신과 검집을 분리했다.


눈이 부셨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빛에 자이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온전히 두 눈을 떴을 때 자신과 마주한 상대는 환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며 자이젠은 말문이 막혔다.


"반가워. 난 오시타리 켄야. 이름이 뭐니?"

"……."

"응?"

"……자이젠, 히카루."

"히카루! 이름처럼 반짝이는구나. 예쁘다."


제멋대로 부르곤 제멋대로 손을 뻗어온다. 그 손에 제 머리칼이 감기는 걸 느끼며 자이젠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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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난무au 사니와 켄야와 타도 히카루...

사니와는 심신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사니와가 손에 붙어버려서.

검의 영혼이라고 할 지, 암튼 남사화를 볼 수 있는건 사니와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내 설정.

검은 검의 이름이 앞, 도공의 이름을 뒤에 붙인다고 한다~

5-2 도는동안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