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2014. 12. 26. 00:01

합숙소의 크리스마스 이브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도 어김없이 훈련한다는 명에 나름의 반항심으로 이브 파티를 성대하게 즐긴 중학생들은 이내 하나둘씩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먼저 자러 간다는 같은 방의 히요시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이젠은 블로그에 갱신할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많은 양의 사진을 천천히 살펴보았으나 당연하게도 자이젠이 찾는 그 사람은 없었다. 스피드스타니 뭐니 속도에 유독 집착하는 그 사람은 과연 빠르게 잠이 들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열린 파티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알고 있는데도 자이젠의 시선은 액정을 떠날 줄을 몰랐다. 노려본다 해서 그 사람이 나타날 것도 아닌데 우습게도 오래오래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인기척 또한 느끼지 못했다.


"뭐야, 자이젠이잖아."


갑작스럽게 불린 자신의 이름에 놀란 자이젠이 돌아보자 사진 속에서 반복해 찾던 그 사람이 존재했다. 언젠가의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고작 몇 시간을 못 본 것뿐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그 사람의 말에 자이젠은 잠깐 눈을 마주한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이내 다시 액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사진엔 관심이 사라졌지만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아는 척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나 찾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마주하자 급속도로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안자고 뭐하노?"

"그러는 켄야 씨는 잔다매요."

"아, 잤다. 잤는데 깨뿟다."


여기저기 뻗친 머리가 증거였다. 오시타리는 터덜터덜 걸어와선 자이젠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진한 하품을 해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이젠은 그냥 다시 자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까 신경 쓰였다. 테이블 위에 남아있는 과자를 집어 먹으며 파티는 즐거웠냐고 오시타리가 물었다. 글쎄요…. 여전히 액정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자이젠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을 했다. 사실대로 말하기가 싫었다. 늘 그랬다. 자이젠은, 오시타리의 앞에선 솔직해지기 싫었다. 특히나 지금의 오시타리에겐 더더욱.


"어, 열두시다. 메리 크리스마스대이."


12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입안에 과자를 잔뜩 집어넣고 우물거리느라 오시타리의 발음이 뭉개졌으나 자이젠은 똑똑히 들었다. 켄야 씨도, 메리 크리스마스. 대꾸하자 입안에 든 것들을 꿀꺽 삼키곤 빠르게 물었다.


"내 진짜 궁금한거 있었는데 물어봐도 되나?"

"아뇨."

"뭔지 일단은 들어봐라!"

"들어보면 대답해달라고 할거잖아요."

"아, 거야 글치만..."


빠르게 납득했다. 사실 자이젠은 그 질문이 궁금하지 않았다. 보나 마나 뻔했다. 그 날에 관해 물어보려는게 분명했다. 분명 오시타리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할 테지만 자이젠은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카면 내 크리스마스 선물로 묻게 해도."


크리스마스 선물로 대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라 그저 묻게 해달라는 오시타리의 말에 자이젠은 속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뭔데요? 자이젠의 허락에 눈을 빛내며 오시타리가 꺼낸 말은 예상외의 질문이었다.


"니 합숙소엔 왜 왔노?"


말이 쫌 이상한가. 아니, 귀찮다고 안온다 캤던 아가 갑자기 오면 안궁금하겠나. 계속 물을라 캤는데 깜빡했다.


예상외의 질문에 자이젠은 순간 멍해졌다. 오시타리가 한 말이 분명 귀에는 들어왔고 똑똑히 이해했는데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시타리는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에서 이내 퐁, 하고 합숙 동의서를 받은 그 날이 샘솟았다. 그 날, 와타나베가 한 명씩 쥐여준 합숙 동의서를 받은 그 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오시타리는 자이젠에게 고백했었다.


'내 니가 좋다.'


집에 가서 부모님 보여드리고 싸인 받아와래이. 마치 방금 들은 와타나베의 말처럼 단조로웠기에 자이젠은 얼핏 자신이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마주 본 오시타리의 얼굴 또한 언제나와 같아서 더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오시타리의 귀를 보지 못했다면 그저 자신이 잘못 들었겠거니, 하고 넘겼을 게 분명했다. 귀만 새빨갛게 물든 채로 오시타리는 자이젠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끙끙거렸다. 안절부절못하는 속내를 숨기며 한껏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쓰는 게 눈에 보여서 우스운 모양새였다. 고백을 들은 자이젠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눈치를 보던 오시타리가 이내 말을 이었다.


'아니, 뭐 대답해달라는건 아니고…. 걍 글타고…….'


대답을 바라지 않는 고백은 그저 자기만족일 뿐,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자이젠의 시선을 회피하며 카면 먼저 간디. 하고 오시타리는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남겨진 자이젠만 어처구니없이 그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길로 집에 돌아간 자이젠은 자신에게 닥친 일에 대해 내내 고민하느라 동의서를 잊었다.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려서 다음날 와타나베가 동의서를 언급하자 그제야 떠올렸다. 부 활동 내내 오시타리는 어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평소와 같았고 그래서 자이젠은 도저히 오시타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밤새 고민한 시간이 아까워서 억울했다.


'전 안갈래요.'


귀찮아요. 짧게 대답하곤 돌아섰다. 오시타리의 반응이 궁금했으나 자이젠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시타리는 합숙을 떠나는 전날까지 자이젠에게 별다른 말이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게도 자존심 상해서 자이젠도 무신경하게 대했다. 그런 척을 해왔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막상 합숙을 떠난 오시타리가 눈에 보이지 않자 다른 의미로 자이젠은 자존심이 상했다. 콘지키를 찾으러 합숙소로 가자는 히토우지의 제안에 수락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뭐야, 자이젠이잖아.'


숲 속에서 우연히 재회했을 때, 고작 며칠을 못 본 것뿐이었는데도 오랜만에 만난 기분에 내심 반가웠던 자신과 달리 건조한 반응을 보인 오시타리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지금과 마찬가지로 평온하디 평온한 부름에 자신은 어떻게 반응했던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부끄러워하며 고백한 오시타리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합숙을 시작한 뒤로도 줄곧 그랬다. 오시타리는 사촌인 효테이의 천재 오시타리 유시와 새롭게 복식을 맞춘 세이슌의 모모시로 타케시와 어울리기 바빴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 자이젠과의 대화 자체를 피하던 오시타리와 지금처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진득하게 대화한 것은 분명 오랜만이었다.


말할까, 말까. 어쩔까. 자신에게 고백한 누군가가 눈에 보이지 않자 신경 쓰여서 쫓아왔다고. 자신에게 고백했다는 것조차 잊은 듯,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오시타리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겠지만 자이젠은 잠깐 고민을 했다. 그런 자이젠의 대답을 기다리던 오시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니가 와서 좋다."


언젠가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또 의심할 뻔했다. 저 빨갛게 물든 귀만 아니었다면. 그 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이젠은 뭔가 알 듯 말 듯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심장 깊숙이 무언가가 뜨겁게 일렁이다 왈칵 터져서 뜨겁게 피를 타고 온몸을 떠돌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잘 모르겠는데 알 것도 같은데. 다시 자러 가야겠다며 일어서는 오시타리의 소매 끝을 자이젠이 붙잡은 건 순간이었다.


"내한테도 크리스마스 선물줘요."

"어, 어?"

"쫌만 더 있어줘요."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알 것 같으니까. 미묘한 표정으로 다시 얌전히 자리에 앉는 오시타리를 바라보며 자이젠이 정리되지 않은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크리스마스는 이제 시작이었다.









세별 당첨되고 싶어서 열심히 썼읍니다,,